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병합 (문단 편집) == 무효화 == 이 합병은 2차 대전 이후 없던 것이 되었는데 연합국은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무효로 선언했다. 주민들의 의견이 어떻든 승전국인 연합국 측에서 무효라고 정한 이상 2차 대전의 패전 이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된 상태는 유지될 수 없었다. 연합국의 승전과 함께 안슐루스는 그 자체가 [[흑역사]]화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어쨌든 이 시점까지 자발적인 병합 유지는 가능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가 스스로 독일과의 통일 영구 금지, 영세중립국 지위 유지를 조건으로 제시하여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대신 그 대가로 오스트리아는 1955년 주권을 회복하였다. 또 이런 이유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는 비나치화([[탈나치화]])도 대충 넘어갔다.[* 물론 진짜 [[네오 나치]]가 대놓고 나대는 수준은 아니지만 독일에서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페기다]] 같은 유사 네오 나치 급 정치극단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에서는 정치판에서도 활동이 가능한 수준이고 네오 나치들도 당당히 거리에서 드러내는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러고도 나중에 뻔뻔하게 악당 역할은 독일한테 전부 떠넘기고 1938년 3월 독일과 합병 당시 합병에 열광하는 국민들이 전부 나치 독일에서 만든 조작 사진이거나 강제로 동원된 것인 마냥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첫번째 피해자''''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오스트리아 피해자론'[* 독일어: Opferthese, 영어: [[https://en.wikipedia.org/wiki/Austria_victim_theory|Austria victim theory]].]을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이러한 행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왔을 때 전쟁 수행에 협조했던 헝가리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묘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트리아농 조약]] 참조.] 재미있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는 1943년 연합국이 전후처리를 논의하던 중에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 했고 도덕적인 책임 문제를 제대로 따질 생각이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연합국은 독일의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컸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약소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일단 독일로부터 떼어놓기는 하는데 여기까지 분단시켜 곧 도래할 것이 명백했던 [[냉전]]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특수한 지위의 국가'로 분류하고 중립국화하기 위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고안했다. 스탈린은 오스트리아도 전쟁의 주범이란 입장이었지만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하는 방안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사실상 묵인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이 개념이 명시적으로 거론되었는데 정작 오스트리아는 괴벨스의 선전에 잔뜩 절어 있었고 '모스크바'라는 단어가 주는 [[볼셰비키]]적 어감 때문에 소식을 들은 반응은 떨떠름했다. 이러한 피해자론은 뭇 나치 피해자들에게 격분을 샀고 현재까지도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비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훗날 오스트리아에서 [[쿠르트 발트하임]] 전 대통령의 나치 독일군 복무 이력과 이로 인한 논란 역시 여기에서 기인된 문제들중 하나다.[* 그러나 독일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처럼 나치당 활동 이력이 있었던 나치당원 출신이 전후에도 정부수반을 역임하는 등 국내적으로 논란이 없지만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